프랑시스 풀랑크

프랑시스 풀랑크와 완다 란도프스카

프랑시스 장 마르셀 풀랑크(Francis Jean Marcel Poulenc, 1899년 1월 7일~1963년 1월 30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프랑스 6인조 가운데에서는 가장 토박이인 파리 출신이며 어릴 적부터 모차르트드뷔시를 열렬히 사랑하였다고 한다. 초기의 작풍 등은 특히 이 영향이 현저하며 또한 스트라빈스키사티의 영향도 엿보인다. <세 개의 무궁동, Trois Mouvements Perp tuels>이나 가곡 <동물시집>, 피아노와 18악기의 <오바드>, 발레 <암사슴> 등 어느 것이나 신선한 감각과 간결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에 넘친 초기의 대표작이다. 1930-1940년대에 걸쳐서는 많은 가곡을 작곡하여 <미사곡>, <가면무도회>, <인간의 모습>, <스타바트 마테르> 등의 좋은 작품을 낳았다. 제2차 대전아폴리네르에 의한 <테레지아스의 유방(乳房)>, 베르나노스에 의한 <카르멜회 수녀의 대화>, 콕토에 의한 <인간의 목소리> 등 3개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드뷔시 이후의 프랑스에 우수한 오페라 작품이 나왔다고 평가되었다.

생애

초기

뿔랑은 파리 8구에서 에밀 뿔랑(Émile Poulenc)과 제니 뿔랑(Jenny Poulenc)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에밀 뿔랑은 아베롱주의 도시인 에스빨리옹(Espalion)의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후에 Poulenc Frères라는 화학 회사의 공동 소유주가 되는데, 이 회사는 현재까지도 Rhône-Poulenc라는 제약회사로 유지되고 있다. 어머니인 제니 뿔랑은 예술에 폭 넓은 관심을 가진 파리지앵으로, 뿔랑은 후에 자신의 독실한 신앙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세속적이고 예술적인 부분은 어머니로부터 무려받았다고 회고한다. 평론가인 클로드 로스탱(Claude Rostand)은 뿔랑을 일컬어 "반은 수도승, 반은 개구쟁이"라고 평가하였다. 뿔랑의 어머니는 유능한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고전주의 음악에서부터 덜 유명한 음악까지 다양한 곡들을 연주하였는데, 이는 후에 "사랑스럽지만 나쁜 음악"에 대한 취향을 갖는데 기여하였다고 한다.

뿔랑은 다섯살 때 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으며, 여덟살에 드뷔시의 음악을 듣고서 그 독창적인 음색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슈베르트겨울나그네와, 스트라빈스키봄의 제전으로부터 특히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뿔랑은 후에 음악원에 진학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파리 9구에 있는 리세 콩도르세(Lycée Condorcet)에서 수학하였다.

1916년에는 친구인 레몽 리노세(Raymonde Linossier, 1897-1930)으로부터 작가인 아드리엔 모니에(Adrienne Monnier)의 서점인 Maison des Amis des Livres (책 친구들의 집)을 소개받아 여기서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등의 아방가르드 시인들을 만나게 되고, 이는 후에 이들의 시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게 되는 계시가 된다. 또한 같은 해에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네스(Ricardo Viñes)의 제자가 되는데, 뿔랑은 후에 그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아주 매력적인 사람으로, 매우 거대한 콧수염을 가진 괴짜 귀족(hidalgo)였다. 가장자리가 평평한 솜브레로를 쓰고 버튼이 달린 부츠를 신고 다녔는데, 내가 페달을 충분히 누르지 않았을 때면 부츠로 정강이를 툭툭 치곤 했다. ... 나는 그를 미친듯이 좋아했었는데, 1914년에는 그만큼 드뷔시와 라벨을 잘 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네스와의 만남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나는 그에게 모든것을 빚졌다 ... 풋내기 시절의 노력과 피아노에 대한 모든 지식이 다 그로부터 나왔다.

뿔랑은 16세에 어머니를 잃고, 2년 뒤에는 그의 아버지마저 죽는다. 뿔랑은 비네스를 단순히 스승이 아닌, 정신적인 멘토로 깊이 의지하게 된다. 비네스는 후에 뿔랑의 초기 피아노 곡 세곡을 초연하고, 조르주 오릭과 에릭 사티에게 소개시켜주어 이들로 하여금 후에 뿔랑의 발전을 돕도록 하였다.

오릭은 뿔랑과 동갑으로, 둘이 처음 만날 때 오릭의 음악은 이미 파리의 주요 콘서트장에서 연주된 상태였다. 둘은 서로 비슷한 음악적 견해를 공유하였고, 뿔랑의 생애동안 오릭은 그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어 "정신적인 형제"로 평가되었다. 사티는 독특한 성향으로 프랑스의 주류 음악계에서 고립된 사람이었지만, 오릭과 뒤레, 오네게르 등 젊은 음악가들의 멘토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부르주아 아마추어인 뿔랑을 가르치는것을 거부하였지만, 후에 다시 그의 제자 모임인 "Les Nouveaux Jeunes"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뿔랑은 사티의 영향을 "영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후에 피아니스트인 알프레드 코르토는 뿔랑의 피아노곡인 '세개의 무궁동'을 "사티의 풍자적 성향을 현대의 지식인 계층의 표준에 맞게 개조하였다"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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