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

왕망
본명 왕망(王莽)
재위 8년 ~ 23년
다른 이름 거군 ( )
배우자 왕씨(의춘후 왕함의 딸)
자녀 왕우, 왕획, 왕안, 왕임, 왕흥, 왕광, 왕황후(평제의 황후), 왕엽, 왕첩 등
부친 왕만
모친 공현군
이전 황제 정안공
다음 황제 경시제
왕조 신나라

왕망(王莽 [1], 기원전 45년 ~ 기원후 25년 10월 6일)은 중국 전한의 관료이자 (新)나라의 황제로, 자는 거군(巨君)이며 위군(魏郡) 원성현(元城縣) 사람이다.

황제 즉위 전의 작위는 안한공(安漢公)이며, 원제(元帝)의 황후 왕정군(王政君, 효원황후)의 조카로 성제(成帝)의 어머니쪽 사촌형제에 해당한다. 왕만(王曼)의 차남으로 왕우(王宇) · 왕획(王獲) · 왕안(王安) · 왕림(王臨) · 왕흥(王興) · 왕광(王匡) 등의 아들을 두었다. 손자(왕우의 아들)는 왕종(王宗)이며, 딸은 평제(平帝)의 황후가 된 왕씨와 함께 왕화(王曄), 왕첩(王捷) 등이 있었다. 본부인은 한의 승상(丞相)을 지낸 왕흔의 손자 왕함의 딸이며, 왕영(王永)의 동생으로서 왕광(王光)의 숙부이다.

생애

초기 생애

황후의 자리에 오른 백모 왕정군에 의해 백부들이 제후에 봉해지고, 고위 관리로서 유복한 생활을 보내는 가운데, 아버지 왕만과 형 왕영(王永)이 일찍 사망하여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다. 왕망은 공손하고 검소함을 가지고, 패군(沛郡)의 진삼(陳參)을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고, 유생의 복장을 입고, 어머니와 형수를 시중들었다. 또 조카의 왕광(王光)을 양자를 삼아 친자식 이상으로 양육하여(뒤에 살해), 왕망의 아내가 불평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권력을 장악하다

백부 대장군 왕봉(王鳳)이 병이 들자, 간병을 하였고, 왕봉의 인정을 받았다. 왕봉이 죽은 이후, 왕상(王商)과 왕근(王根)의 추천과 백모인 황태후의 후원으로 왕망은 순조롭게 출세한다. 친척 순우장(淳于長)을 실각시켜, 대사마(大司馬)가 되면서, 왕망의 기세는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릴 정도로 되었다. 애제(哀帝)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하여 한때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정계 복귀의 탄원이 계속 올라오자 그는 정계 복귀를 한다.

기원전 1년 한 애제가 급사하고, 한 평제(漢平帝)가 즉위하면서, 왕정군은 이 기회를 타서 태황태후의 지위를 이용하여, 한 애제의 외척 및 측근 세력을 배제하여, 조카 왕망을 대사마에 임명하였다. 그 무렵 왕망은 찬탈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눈치 챈 왕정군은 왕망을 제후로 임명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반대를 하는 입장을 취했다. 한 평제가 독살되고 유영(劉嬰)이 황제로 옹립 되자, 왕망이 주나라성왕 (成王)과 주공 단(周公旦)의 고사에 모방하여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였다. 왕망은 왕정군에게 전국옥새를 자신에게 인도하도록 요구했을 때, 다툼이 벌어져 옥새는 훼손되었다.

영시 원년(기원전 16년),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 [2] 애제가 붕어하자 애제로부터 황제의 옥새를 맡고 있던 대사마 동현(董賢)으로부터 옥새를 강탈하여, 중산왕 간(衎)을 옹립하고(평제) 대사마가 되었다. 이어 고문경학의 대가였던 유흠(劉歆)을 비롯한 유학자들을 많이 끌어들여 유학과 서상(瑞祥), 부명(符命, 일종의 예언서)에 근거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민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차남 왕획(王獲)을 잡아 노복(奴僕)을 죽인 죄를 묻는가 하면 장남 우(宇)의 모략죄를 물어 감옥에 가두었다가 모두 자결하게 했다. 딸을 평제의 황후로 책봉하고, 재형(宰衡), 안한공(安漢公)이 된 후, 5년에 14살이 된 평제가 사망하고(왕망에 의한 독살 [3]), 광척후(廣戚侯) 현(顯)의 아들 영(嬰)을 황태자로 세워서 스스로는 가황제(假皇帝) · 섭황제(攝皇帝)로서 섭정하며 조정의 만기를 집전하였다.

황제가 되다

천하를 노리고 있던 왕망은 고문을 전거로 자신의 제위 계승을 정당화하려 했다. 마침 애장(哀章)이라는 인물이 고조(高祖)의 예언이라며 「금궤도(金匱圖)」와 「금책서(金策書)」를 위조해 바쳤는데 [4], 이를 전거로 거섭 3년( 8년), 왕망은 고조의 영혼에게 선양을 받았다고 하여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신 왕조를 열었다. 이 사건은 역사상 최초의 선양이었지만 실상은 찬탈과 다름이 없었다. 태황태후로서 전국새(全國璽)를 맡고 있던 효원황태후 왕정군은 사자로서 옥새를 받으러 온 왕망의 사촌형제 순(舜)에게 왕망에 대한 욕설을 퍼붓고, 순이 옥새를 내어줄 것을 재촉하자 옥새를 내던지며 "너희 일족은 모두 멸망할 것이다"라 저주했다고 사서는 전한다.

주 시대의 치세를 이상으로 삼은 왕망은 《주관(周官)》 [5]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국가 정책을 실시했지만, 현실성이 결여된 각종 정책은 단기간에 파탄나고, 화폐 유통과 경제 활동도 정지되어 민중의 상활은 한조 말기 이상으로 곤궁해졌다. 또한 흉노선비 등 주변 민족과 고구려 등의 국가의 지도자의 칭호를 제멋대로 고치고, 특히 고구려왕의 칭호를 중화사상에 근거하는 모멸적인 명칭인 하구려후(下句麗侯)로 부르게 해 고구려와 충돌하였으며, 이는 이민족들의 반발과 관계 악화로 이어져 이를 토벌하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또한 전매제 강화도 실패하여 신의 재정은 빈곤해졌다.

반란과 최후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농민들은 마침내 신 왕조에 맞서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18년적미의 난이 일어났고, 남양군(南陽郡)에서 옹립된 유현(劉玄)을 토벌하러 보낸 신의 100만 군대도 곤양(昆陽)전투에서 경시제 휘하의 유수(劉秀)에게 패배하여, 이것으로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여 대혼란에 빠진다. 그의 신하도 배신하고, 장안에는 경시제의 군대가 입성, 왕망은 그 혼란 중에서 두오(杜吳)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수급은 경시제가 있던 성으로 보내졌으며, 몸은 공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마구 찢어지고 흩어졌다고 한다.

왕망의 죽음으로 신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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