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11세

비오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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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아킬레 암브로조 다미아노 라티
임기 시작 1922년 2월 6일
임기 종료 1939년 2월 10일
전임 베네딕토 15세
후임 비오 12세
탄생 1857년 5월 31일
오스트리아 제국 밀라노 현 데시오
선종 1939년 2월 10일 (81세)
바티칸 시국 사도 궁전
서명 PiusPPXI signature.jpg

교황 비오 11세( 라틴어: Pius PP. XI, 이탈리아어: Papa Pio XI)는 제259대 교황(재위: 1922년 2월 6일 ~ 1939년 2월 10일)이다. 본명은 아킬레 암브로조 다미아노 라티( 이탈리아어: Achille Ambrogio Damiano Ratti)이다. 위엄 있고 집중적이며 학구적인 동시에 활동적인 교황으로서 선교, 외교, 내부 쇄신, 적응 등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교황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오 11세는 특히 가톨릭 액션 운동을 통해 평신도들이 교회 활동에 대한 참여를 조성하는데 큰 공로를 하였다.

그의 치세기간 중에 1870년 이래 문제였던 로마 문제가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교황은 오랜 감금 생활에서 해방되어 바티칸 시국에서나마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멕시코, 스페인,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성직자들을 압송해 처형하고 성당을 공격하는 등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이루어졌다. 멕시코와 스페인의 기독교 박해는 가톨릭교회가 주요 대상이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모든 기독교 종파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었지만, 특히 바티칸과 일치를 이룬 동방 가톨릭교회에 대해서는 유달리 극심하였다. 비오 11세는 당대에 흥기하던 공산주의국가사회주의에 대해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인 인권을 손상시키고 있다면서 통렬하게 비판하였지만, 이에 대해 당시 서구 민주사회는 어떠한 반응이나 지지도 보내지 않았다. 비오 11세는 이를 ‘침묵의 공조’라고 이름 붙이고 개탄하였다.

1925년 비오 11세는 반성직자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10월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도록 제정하였다. 이는 구세사의 특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왕임을 경축하고 그의 통치권이 개인과 가정과 사회 및 전 우주에 두루 미치고 있음을 강조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생애 초기와 경력

비오 11세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킬레 라티는 1857년 이탈리아 밀라노 현 데시오에서 견직물 공장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 어렸을 때부터 성직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던 그는 1879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교수 신부로서 성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882년 그는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 교회법, 신학 등 세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888년 파도바 신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학문 분야는 고대와 중세 시대 교회 문서로서, 덕분에 그는 전문적인 고문서학자로 정평이 나게 되었다. 결국 그는 1888년 교직을 떠나 밀라노에 있는 암브로시오 도서관(Biblioteca Ambrosiana)에 가서 1911년까지 온종일 도서관 안에서만 지냈다. [2]

암브로시오 도서관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밀라노 교회의 전례 양식인 암브로시오 미사 전례서를 출판, 발행하였으며, 성 가롤로 보로메오의 삶의 활동에 대해서 조사하고 많은 저서를 집필하였다. 1907년 암브로시오 도서관의 도서관장이 된 그는 옛 문헌을 복원하는 계획과 암브로시오 도서관의 수집 목록 재분류 계획에 착수하였다. 또한 열렬한 등산가였던 그는 여가 시간에는 몬테로사나 마터호른 산, 몽블랑 산, 프레솔라나 등의 정상까지 도달하였다. 1911년 교황 비오 10세의 초대를 받은 그는 바티칸에 가서 바티칸 도서관의 부도서관장이 되었으며, 1914년에는 도서관장으로 승진하였다. [3]

폴란드에서의 추방

젊은 사제 시절의 비오 11세

아킬레 라티의 사제 생활은 1918년에 들어서면서 급속도로 바뀌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아킬레 라티에게 도서관장 생활을 그만두고 외교관으로서의 새 임무를 맡을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교황의 명령을 받아 당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 아래 있었던 폴란드에 교황 순시관(즉 교황의 대표자)으로 파견되었다. 1918년 10월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전 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폴란드의 독립을 축하해주었다. [4] 1919년 3월 그는 열 명의 새 주교들을 임명하였는데, 여기에는 아킬레 라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아킬레 라티의 신분을 교황대사로 승격시켰다. 1919년 10월 아킬레 라티는 명의대주교로 임명되었다. [4]

베네딕토 15세와 라티 교황대사는 폴란드 정부가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인 성직자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며 재차 경고하였다. [5] 볼셰비키가 바르샤바로 진입하려고 하자 베네딕토 15세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폴란드 국민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1920년 8월 소비에트 연방붉은 군대가 바르샤바로 진군해오자 황급하게 피신하는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과는 달리 아킬레 라티는 주위의 간곡한 요청도 뿌리치고 용기 있게 남아 있었다.

아킬레 라티는 폴란드를 위해 계속 일하고 싶어 했으며, 폴란드와 소비에트 연방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겠다고 자처하였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각오도 하고 있었다. [6] 하지만 베네딕토 15세는 뛰어난 외교관이었던 아킬레 라티가 순교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가 러시아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6] 그러자 아킬레 라티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접촉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폴란드 내에서 그렇게 많은 공감을 얻지는 못하였다. 교황은 폴란드 가톨릭 성직자들의 잠재적인 정치적 동요에 대처하기 위해 아킬레 라티를 실레시아로 파견하였다. [5] 그 후 아킬레 라티는 폴란드를 떠날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레시아에서 열린 선거에서 그가 가진 중립적인 태도에 대해 독일인들과 폴란드인들 모두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고 바르샤바 당국은 사실상 그에게 떠날 것을 강요하였다. [7] 국수적인 독일인들은 주폴란드 교황대사가 선거를 감독하는 것에 반감을 가졌으며, 폴란드인들은 그가 사람들을 선동하는 성직자들의 권한을 박탈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8] 같은 해 11월 20일 독일인 추기경 아돌프 베르트람이 성직자들의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지한다는 교황청의 결정을 공표하자 바르샤바에서는 아킬레 라티를 제명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8] 2년 후, 아킬레 라티는 교황 비오 11세가 되었으며, 이후 1922년부터 1958년까지 36년 동안 대폴란드 정책을 피에트로 가스파리와 에우제니오 파첼리와 함께 이끌어나갔다.

교황 선출

밀라노 대교구장 시절의 비오 11세

오랫동안 학문에 몸 담아왔던 그는 교회 내에서 급속도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932년 6월 3일 추기경회의에서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세 명의 추기경 임명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는 아킬레 라티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킬레 라티는 또한 밀라노 대교구장으로도 임명되었다. 베네딕토 15세는 추기경 서임식에서 새로 임명된 추기경들에게 “자,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붉은 모자를 씌워 주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하얀색이 될 것입니다.”라고 농담을 하였다. [9] 바티칸에서의 축하 연회를 마치고, 아킬레 라티는 자신의 새로운 소임에 대한 영적인 준비를 하기 위해 몬테카시노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잠시 피정을 떠났다. 그리고 1921년 8월 프랑스의 루르드까지 가는 밀라노의 성지 순례에 동참하였다. [9] 아킬레 라티는 1921년 9월 8일 밀라노에서 착좌식이 있기 전에 자신의 고향인 데시오를 방문하였으며, 그곳에서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22년 1월 22일 베네딕토 15세가 갑작스럽게 폐렴으로 선종했다는 소식이 발표되면서 [10] 아킬레 라티의 밀라노 대교구장 생활은 도중에 멈추게 되었다.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콘클라베에서 아킬레 라티는 1922년 2월 6일 총 14표를 획득하여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의 교황으로서의 새 이름을 비오 11세로 명명하였다.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는 비오라는 이름을 택한 전임 교황들인 비오 9세비오 10세와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학자 출신이었던 비오 11세는 과학과 탐구에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전혀 닮지 않았다. 교황으로서의 그의 첫 업무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발코니에 서서 우르비 에트 오르비를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의 바로 전임 교황들은 1870년 교황청이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로마를 강탈당한 이래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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